피로사회

저자
한병철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2-03-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우울증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대한 우아하고도 날카로운 철학적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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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를 수 있는 권리

저자
폴 라파르그 지음
출판사
새물결 | 2013-05-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모든 일을 게을리 하세 사랑하고 한잔 하는 일만 빼고그리고 한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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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면접 때 면접관이 이렇게 질문했다고 하자.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부인/남편과 근사한 저녁을 먹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데 퇴근 시간 전에 급한 업무가 생겼다. 이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약속을 취소하고 야근을 해야만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입사하고자 면접장에 들어온 지원자라면 아마 당연히 야근을 하고 부인/남편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것이라 답했을 것이다. 아마 나 역시도 그렇게 답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친구에게 들은 것인데, 친구의 회사 동기가 입사면접때 실제 받은 질문이라고 한다. 이 질문에 대해 그 친구의 동기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우선 우리나라와 가장 시차가 벌어지는 나라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합니다. 야근을 해서 일을 마무리한뒤 부인과 함께 그 비행기를 타고 가서 아직 끝나지 않은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이미 알다시피) 친구의 회사 동기가 되었다.
면접 준비할때, 난 입사만 된다면 회사에서 내 역량을 맘껏 발휘하겠다고, 열심히 일해서 일과 함께 나를 성장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이전 직장에선 도무지 나를 성장시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이대로 도태될 것만 같아서 참을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입사한 회사에서 난 혼란을 느끼는 중이다. 신입으로서의 패기를 맘껏 야근과 특근으로 발휘하는 동기들. 그리고 일이 없으면 퇴근하는 팀선배들. 팀 선배들은 내게 말해준다. 회사보다 자신의 삶이 중요하다고. 너무 회사에 얽매여 있지말라고. 할거 없으면 퇴근하라고. 신입 교육때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2년만 죽은듯이 열심히 일하라고 말하던 임원들의 강의가 무색해졌다. 그 강의를 들으면서 난 날 뽑아준 회사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회사에 기꺼이 내시간을 바쳐야겠다고 다짐을 했더랬다. 근데 지금와서는 그 마음이 바보같은 것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다. 아니, 무엇이 맞는지 혼란스럽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내 삶을 일하는데만 쓰지 말아야 하는 그 어려운 중도의 길은 무엇인가.

면접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친구의 동기의 대답은 야근과 가족을 모두 선택한 현명한 답변이지만 어찌보면 참으로 씁쓸한 답변이기도 하다. 회사일때문에 퇴근하면 녹초가 되어 집에서 가족들과 몇마디 대화도 못나누고, 주말이면 주중에 일하느라 쌓인 피로때문에 늘어져 잠만 자게 되는 우리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기위한 밑천을 벌어들이려고 회사를 다니는데 그 회사때문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아이러니. 회사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지, 회사 외의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뚜렷한 답이 있긴할까?

강신주 박사의 벙커1특강, "일"편을 들으며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것이 이러한 고민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강신주박사는 이러한 상황은 시스템의 문제라고, 노동자인 우리는 마땅히 향유하는 시간, 노는 시간을 극대화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자본가 입장에서야 당연히 회사를 위해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해줘야 이익이 나니까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왜 노동자들도 열심히 일하려고 하는거냐는 거다. 노동자들은 노동하는 시간은 최소화하고 노는 시간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야근하고 특근할 시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더 만나고 좋아하는 뮤지컬을 보러가라고 한다. 심지어 회사 는 쉬러가는 거라고, 퇴근해서 가족들이랑 놀려면 회사에서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고 말하니까 이사람의 입장은 아주 명확하다. 충전하러 회사간다. 회사 사장은 둘째치고 그사람 상사가 알게되면 참으로 펄쩍 뛸 이야기다. 하지만 무턱대고 그럴 수 없다고만 할 수도 없는, 참으로 유토피아적 입장이 아닐 수 없다.

강신주박사의 구어체적인 (듣기엔 무척이나 시원시원하지만 너무 간단하여 구멍이 많아보이는) 강의를 문어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어서 그가 (그리고 대모님이) 추천해준 폴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읽었다(다음에 독서로그로 작성할 예정). 칼마르크스의 사위이기도 한 폴라파르그는 자본주의적 시스템 속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착취가 마땅하고 당연시되었음을 강조하며 노동자들이 이에서 벗어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과잉노동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고 있으므로 노동자들은 이를 당연시여기고 최저근로시간을 요구하고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해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놀고 쉬고 게으르려고 해야 한다는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노동자들은 왜 열심히 일하려는 것일까? 왜 우리는 회사에서 기꺼이 우리의 삶을 소진하려 하는 것일까? 왜 워커홀릭이 되어야만 마땅히 승승장구한다고 여기는 것일까? 단순히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회사에서 짤리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삶을 택하려는 것인가? 일요일에도 회사에 있지 않으면 불안하고, 하루라도 공부하거나 일을 하지 않으면 삶을 낭비한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나를 포함해서…)들도 있다. 서점에는 성공하기 위해서 자기를 이렇게 계발하고 개발해야 한다고 외치는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있다. 이를 보면, 열심히 일하려는 삶, 게으르지 않은 삶을 기꺼이 택하려는 우리의 마음가짐은 누가 강요해서 오는 것이 아닌 듯 하다. 대체 왜 우리는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가며 아득바득 열심히 살려는 것일까?

이것에 대해 답하고자 했던 사람이 있다. 재독철학자, 한병철이다. 시집만한 두께의 책 <<피로사회>>에서 그는 결코 책의 무게만큼 가볍지만은 않은 무거운 문장들로 이에 답하고자 한다.

현대사회는 자기자신에게 도달점이 없는 무한한 지향점을 끝없이 강요하는 자기착취를 "자율적"으로 강요하며, 개인들은 자기착취를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하고 이로인해 스스로 고갈되어간다는 것이다. 그의 책은 독일어로 쓰여있어서 김태환 박사가 번역하였는데, 이 책 뒷부분에 역자가 실은 후기가 책의 내용을 잘 담고있는 듯 하여 옮겨본다.

(역자 김태환의 후기)
이 책의 핵심적인 테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회를 부정해 온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타자에 대한 거부 등, 한병철은 이를 면역학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이 적어도 20세기 말부터 긍정성의 패러다임(능력, 성과, 자기 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등)으로 전환되었거나 전환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회가 푸코적 의미의 규율사회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부정적 주체라고 한다면, 오늘날은 그 자리에 성과사회, 성과주체가 대신 들어선다. 이러한 테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근대 이후의 세계, 포스트 모던한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한병철이말하는 성과사회, 긍정성과잉의 사회는 흔히 얘기되는 후근대적사회, 즉 포스트모더니즘적 사회의 다른이름이다. 냉전의 종식, 다문화주의, 바이러스성 질병의 효과적 퇴치, 규제와 억압의 철폐와 개인적 욕망의 긍정 등 다양한 차원에서 관철되는 긍정성의 패러다임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병철은 바로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이 자아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마치 늘어가는 자신의 지방질에 병들어가는 사람처럼,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마모시켜간다. 그 결과 스스로를 낙오자로 느끼는 우울증 환자가 넘쳐나고, 성과를 위해 약물을 복용하는 도핑주체도 증가하고 있다. 이는 금지, 강제, 억압의 철페, 타자에 대한 관용의 확대가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로 이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무한한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다.


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는 '면역'이라는 개념에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면역은 쉽게 말하면 내몸을 지키기 위해 외부의 병균(항원)을 막아내려고 하는 저항체계인데, 예방주사는 매우 적은 양의 미역한 항원을 일부러 몸에 주입시켜서 이에 저항하여 몸을 지켜낼 수 있는 저항력(항체)을 미리 키워놓는 것이다. 이러한 "면역"적 관점에서는 '나'와 '외부'(혹은 '타인')이라는 경계가 존재한다. 나와 타인이 구분되는 경계가 있어야 나에게 침투하는 병균을 구분할 수 있는 거니까 말이다. 이렇게 '나' 자신과 나를 구속하고 강제하는 '사회'가 있는 소위 "면역학적 패러다임"이 존재하는 사회인 규율사회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에는 부정, 강제, 규율이 존재한다.
반면 현대사회인 '성과사회'에는 이러한 부정성이 없다. 나와 나를 규제하는 외부의 경계가 없어져서 나를 규제하는 주체가 나의 내면화된다. 내가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주체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안돼"라는 부정성이 아니라 "할수 있어"라는 긍정성이 넘쳐난다. 넘쳐남를 넘어 긍정성이 과잉된다. '나는 이러한 사람이 될 수 있어'라는 긍정성의 채찍은 목표에 끝이 없다. 사실상 나는 도달점 자체가 없이 열려있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뛰어간다. 스스로 끝없는 자기착취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끝없는 과정에서 자신은 점점 고갈되고, 도달할 수 없음에 신경적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증에 걸린다. 이러한
성과사회에서 긍정성의 과잉에 의해 도달이 없는 자기 착취를 하고 있는 성과주체들.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성과사회는 '피로'를 향해 달려가는 '피로사회'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우리에게 벗어나야할 현실은 알려주지만 구체적인 실천론은 알려주지 않는 '자기계발서'들과 다를바 없지 않은가? 한병철 박사는 <<피로사회>>의 후미에서 불쌍한 성과주체들에게 희망을 주는 '새로운 피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본문)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그것은 한트케가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분열적인 피로"라고 부른바 있는 바로 그 피로다. "둘은 벌써 끝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오직 자아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의,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피로는, 본래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아무 말 없이,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았다. 아마도 이러한 폭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직 타자를 일그러뜨리는 시선 속에서뿐이었을 것이다."
한트케는 이런 말 못하는, 보지 못하는, 분열시키는 피로에 대한 대립자로서 말 잘하는, 보는, 화해시키는 피로를 내세운다.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으로서의 피로는 자아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틈새를 열어준다. 나는 그저 남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또한 남이고 "남이 동시에 나이기도 하다." 그 틈새는 "아무도 그 무엇도 지배하지 않고 지배적이지조차 않은" 친절한 공간, 무차별성의 공간이다. 자아가 줄어들면서 존재의 중력은 자아에서 세계로 옮겨간다. 자아 피로가 고독한 피로이고 세계가 없는, 세계를 없애버리는 피로라면, 한트케의 피로는 "세계를 신뢰하는 피로"이다. 그것은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가 그 속에 새어들어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그것은 고독한 피로속에서 완전히 파괴된 "이원성"을 복구한다.…
한트케는 노동하는, 움켜쥐는 손에 놀이하는 손을 맞세운다. 놀이하는 손은 움켜쥐지 않는다. "매일 저녁 여기 리나레스에서 나는 많은 꼬마녀석들이 노곤해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탐욕도 없고 손에 움켜쥔 것도 없고, 그저 놀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 깊은 피로는 정체성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풀어놓는다…사물들은 더 불분명해지고 더 개방적으로 되면서 확고한 성질을 다소 잃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무차별성으로 인해 우애의 분위기를 띠기 시작한다. 타자들과의 사이를 가르는 경직된 경계선은 거두어진다. "그런 근본적인 피로 속에서 사물은 결코 그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것들과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사물들이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은 모두가 함께 어깨를 맞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피로는 깊은 우애를 낳고 소속이나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난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한트케는 내재적 성격을 지닌 피로의 종교를 구상한다. "근본적 피로"는 자아의 논리에 따른 개별적 고립화 경향을 해소하고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그 속에서 어떤 특별한 박자가 일어나 하나의 화음을, 친근함을, 어떤 가족적 유대나 기능적 결속과도 무관한 이웃관계를 빚어낸다. 무의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있다.



결국 우리에겐 유대가, 함께하는 무위의 시간이 필요함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유시민선생이 말하는 "연대"가 현대사회의 노동자에게 필요한 핵심열쇠인걸까. 아직은 난해한 그의 철학을 좀더 음미해봐야하겠다.

Posted by 문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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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나

저자
이덕일 지음
출판사
역사의아침 | 2013-07-12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우리 시대의 역사학자 이덕일, 한국사를 참모사의 관점으로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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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만드는 참모의 이야기. 
위대한 왕을 만들기 위해 삶을 기꺼이 희생하기도, 악역을 자진해서 맡기도 하는 
그대의 이름은 킹메이커. 
수많은 왕조실록 기록보다도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할 인물이 아닐까. 
우리가 숱하게 욕하는 우리 윗분들을 
되려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나가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그들을 진정한 왕이 되게 하는 킹메이커가 되어야 한다. 


*희조가 빌려줘서 읽은책. 좋은 책들 빌려주고 권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다.


*밑줄들

역사를 공부하는 장점, 즉 후대인이 전대인을 바라보는 장점은 일의 시작과 과정, 결말까지 모두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역사은 현재를 비춰보는 거울이 되기에 <<자치통감>>이나 <<동국통감>>처럼 역사서에는 '거울 감'자를 많이 쓴다. 앞선 수레바퀴러는 뚯의 전철이 역사의 이칭으로 사용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그러나 앞의 수레가 잘못된 길로 가다가 거꾸라지는 것을 보고도 다시 그 길로 가는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다. 왜 그럴까? 아마도 욕심이나 오만이 인간의 눈을 가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자신은 물론 세상에 대해서도!
세상을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더욱 역사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겸하하게 성찰하는 자에게만 역사는 미래의 문을 활짝 열어주기 때문이다. 역사서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날고 기는 사람들이 거꾸러진 사례를 나열해 놓은 책이기도 하다......현재사회의 바람직한 미래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고민의 소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 들어가는 글에서



어젠다-비주류, 주류사회를 바꾸다. 김유신


선덕왕의 발탁으로 김춘추와 김유신은 점차 신라사회의 새로운 주류로 발돋움한다. 여기에는 남성우위사회에서 여성국왕이란 핸디캡이 있었던 선덕,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라는 핸디캡이 있었던 춘추, 망국 가야계의 후손이라는 핸디캡이 있었던 유신, 세 핸디캡의 결합이었다. 서로의 핸디캡들이 신라사회의 개조와 삼국통일이란 아젠다로 결합하면서 역사의 회오리를 일으킨 것이다. 이후 선덕왕은 국정을 총괄하고 김춘추는 청병외교을 전담하고, 김유신은 군사 분야를 전담하는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이런 역할분담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자기 혁신과 헌신이 필요했다. 

강대국의 몰락이나 약소국의 부흥에는 모두 그 이유가 있다. 물론 나라 뿐 아니라 회사나 학교 등 작은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어젠다를 상실한 데 있다. 김춘추와 김유신처럼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하고, 그런 어젠다에 사회의 동의를 얻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주도세력이 나타날 때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시야-내부의 지분대신 더 넓은 곳을 바라보다:소서노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의 입김이 강했다. 유학이 지배이념이 되면서 여성들의 지위는 낮아지지만 인조반정 이전까지만 해도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다만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점 만이 다를 뿐이다. 고대사회는 여성들의 역할이 더욱 강해서 정치 참여는 물론이고 건국할 수도 있었다. 그러기에 소서노는 기존의 기득권에 안주해 현실을 바라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는 사람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강인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길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우리를 이끌고왔다. 

소서노는 후대인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한국 고대사회에서는 여성도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소서노는 기존의 기득권에 안주해 현실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는 망명객 주몽에게 명분과 실력이 있음을 알고 과감하게 그를 왕으로 만들었으며, 고구려를 건국했다. 그러나 북부여에서 온 유리가 주몽의 자리를 이어받자, 자신의 지분을 요구하며 싸우는 대신 새로운 나라를 새우는 길을 택했다. 이때 장남 비류가 아닌 차남 온조를 왕으로 선택한 것도 소서노다운 선택이었다. 
그녀는 주몽을 선택해 대륙국가인 고구려를 건국했고, 온조를 선택해 해양국가인 백제를 건국했다. 한국사의 원형인 대륙성과 해양성이 소서노의 일생에 온전히 담겨있는 것이다. 현 사회는 안의 일로 더 시끄럽다. 안의 일이 물론 중요하지만 때로는 밖을 바라보는 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것이 더 큰 결과물을 낳는다는 것을 소서노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사상-생각의 힘으로 세상을 뒤집다:정도전

천하를 삼킬듯한 황하의 거대한 물줄기도 처음에는 작은 한 방울의 물에서 시작하듯이, 역사에서도 사상가 한 명의 등장이 천하의 운명을 바꾼다. 역사를 바꾸는 혁명가들은 스스로 낮은 곳에 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가 낮은 자들의 시각으로 새상을 바라볼 때 혁명의 씨앗이 잉태되고 그 사상을 실천에 옮길 때 혁명의 꽃이 핀다. 한 지식인의 가슴 속 분노가 낳은 사상이 체제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는 것이다. 한 사상가의 결심과 전략은 한 체제 문제의 정점에서 이를 교체할 수 있는 새싹을 마련한다. 정도전의 일생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근본적인 메세지는 한 사회가 내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비등점으로 치달으면 체제 자체가 무너진다는 교훈일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도 양극화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 문제를 사회 내부에서 순리대로 해결하는데 실패한다면, 똑같이 비등점을 향해 치닫게 될 것이다. 정도전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이런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운-평생 할말 다 하면서 고종명하다: 황희

서출로 태어난 황희는 아랫사람의 처지를 늘 생각했다. 국가의 정책을 수립할 때는 원칙을 지키면서 응용했기에 유연했지만 경직되지않았다. 검찰총장격인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고, 육조의 판서를 두루 겪었으며, 세 가지 정승직도 모두 맡는 특이한 경력을 세웠다. 이처럼 그는 항상 권력자의 자리에 있었지만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다. 황희는 스스로를 낮추면서 자신을 높였고, 자신이 섬기는 군주도 높아지게 만든 인물이었다. 

실력-성실과 기술로 한양도성을 쌓다:박자청

현재 우리 사회도 점점 개천에서 용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다는 우려가 많다. 앞으로 우리는 박자청•장영실 등이 배출되었던 역동적인 조선 초기를 지향할 것인가, 전 세계적인 흐름과는 달리 신분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다 끝내 나라가 망했던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 후기를 지향할 것인가. 지금까지 서울에 남아 있는 박자청의 손때가 묻은 전각들은 이렇게 묻고 있다. 

Posted by 문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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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저자
유시민 지음
출판사
생각의길 | 2013-03-13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힐링에서 스탠딩으로,멘붕 사회에 해독제로 쓰일 책자유인으로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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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훈오빠에게 받은 생일선물.
매우 빠르게 읽혔지만 공채준비하면서 시험관련서적이 아닌 책을 읽는데 죄책감이 들어서 중간중간 많이 멈췄더니 한 번 다 읽는데 꽤 오래걸렸다. 


매력적인 책의 제목.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의 답을 찾는건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다. 불혹의 유시민 선생도 이걸 고민고민하다 책까지 쓰신 것 보면, 답이 딱 떨어지는 단답식 문제가 아니라 평생 고민해야되는 문제인게 맞는가보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같다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생각의 끝은 삶의 끝인 죽음에 닿을 거고, 이런 의미에서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삶 전체를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일테니까.

어떻게 살 것인지 책 한권에 걸쳐 고민하고 이야기하는 유시민 선생도 책의 마지막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지 말하고 있다. 



나도, 저렇게 죽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아두고 
모두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하며
행복하게 인사하고
건강한 몸은 의사에게 주고
한줌 재로 바뀌면 잘 썩는 천에 담겨
오래 사는 느티나무 아래 묻고
그 앞에 큰 돌 몇개 두고
내 아이들과 그 아이들이 가끔 놀러와
꽃한송이 꽂아두고 자연속에서
다정스럽게 이야기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유시민 선생의 '생전 계획'에 대한 글. 난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애잔하고 슬퍼진다. 죽음을 객관적인 사실로 인정하기에 앞서 슬퍼지는걸 보면 난 아직 어린이인가보다. 죽음을 내 자신의 일이 아니라 지인의 갑작스러운 상이나 안타까운 뉴스 정도로 접하는 일이 더 많아서 그런 것 일까. 
하지만 유시민 선생의 죽음 직전의 '생전 계획'에 대한 글을 읽거나 노희경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읽으면 나도 죽기 전에 어떤 식으로 삶을 정리하고 싶은지 생각해보고 싶어진다. 






#그 외의 밑줄

- 알베르 카뮈의 인생을 생각하며 자문해본다.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그 일은 내 삶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나는 어떤 놀이에서 즐거움을 얻고 살았으며 어떤 놀이를 더 하고 싶은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며 뜨겁게 사랑받고 있는가?
지금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식이 만족스러운가?
누구와 함께 어디엔가 속해 있으면서 서로 공감하고 손잡으려는 의지를 충분히 표현하면서 살고 있는가?
그래야만 할 이유도 없이 지레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산 것은 아니었던가?'

Posted by 문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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