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아마존의 비밀>이란 회사자체제작 동영상을 ​보여줬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구글에 검색했다. 대체 아마존 기업문화 논쟁이 어떤거야?

그랬더니 영 다른 시각의 글들이 쏟아졌다.
이건 검색한 글 중 하나다.
​(글 보기)​

회사에서 보여준 <아마존의 비밀>, 이건 뭐 실제 논쟁에서 자기들 필요한 것만 뽑아내고 다른 얘긴 쏙 빼놨네.
직원들보고 열심히 일하라고 말하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다. 어쩌면 독한행동 실천강령같은 것도 아마존에서 벤치마킹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래부턴 페이스북에도 올렸던 내 글.
위에 링크한 글과 함께 쓴 글이다.


아마존의 독한 기업문화를 보고 우리도 각성하고 독한 마음을 다지자고 한다.
아마존의 기업문화 논쟁을 보고 이런 결론을 내리자고 한 건 누구의 발상일까?
아마존의 기업문화 논쟁-뉴욕타임즈에서는 전/현직 직원들의 말을 이렇게 인용했다고 한다.

◾갑상선암을 앓은 여직원은 성과가 부진하다는 이유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
◾유방암에 시달리던 여직원은 해고위험군으로 분류되어 ‘직무향상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녀의 개인적이 고통이 업무 목표를 달성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이유였다.
◾쌍둥이를 임신했다가 유산한 한 여직원은 유산 수술 다음날 출장에 보내졌다.
◾우수한 인사평가를 받아오던 한 직원은 암에 걸린 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해 예전처럼 야근과 주말 근무를 하지 않자 상사는 그녀를 ‘문제아’로 부르기 시작했다.
◾늦은 밤 상사의 메일에 회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왜 바로 답하지 않았는지’ 사유서를 함께 제출해야 한다.
◾한 주 동안 85시간정도를 일하고 휴가를 거의 쓰지 못했다.
◾사무실에서 농담 삼아 말한다. Work-Life Balance! 일이 가장 앞, 삶은 그 뒤, 균형은 저 뒤 어디쯤….

아마존의 경우를 보여주며 우리도 더불어 독한 기업문화를 정착하자고 권장하는건 물론 이런 문화까지 따라서 가지고 오자고 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편협, 편향된 시각으로 단면만 보고 우리에게 이들을 따라하자고 하는건 논리의 비약이 아닌가?
세계적 기업, 아마존이 성공하게 되었던 이유는,
마치 그것이 세계적 기업들의 성공 요인인 것처럼 언급했던 데에서 더 큰 문제가 있었겠지만,
절대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
"기업 문화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CEO의 가치와 철학이다. 특히, 구글, MS, 페이스북, 등 수 많은 글로벌 SW기업들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창업가에 의해 세워지고 성장했다. 아마존도 20년 전 원격 쇼핑을 꿈꾸던 전직 증권맨이 차고에서 창업한 기업이다. 당연히 창업가가 오너인 기업에서는 창업자의 사고방식과 말 한마디가 기업 문화를 결정한다."
즉 애초에 CEO의 사고방식이 그러했다는 거다. 그게 독한 기업문화를 결정지은거고.
그냥 우리 창업주와 CEO의 사고방식이 아마존의 창업자 사고방식과 같다는 걸 알려주는 거였다. 거기서 그들이 저렇게 성공했으니 우리도 그들을 배우자!고 하는건 논리적 비약이고.

심지어 퇴사한 직원의 재입사율이 높다고 했는데 이 글에 따르면 친구들에게 입사 추천하는 비율이 낮다고 한다. 이 얘긴 자신은 계속 다니고 싶지만 남들에겐 추천하고 싶지 않은걸까? 그럴리가.

보여주는대로 믿지 말자. 이것이 오늘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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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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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을 내면화하자.
​남녀는 리더가 되려는 야망에서 차이가 난다-두렵지 않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당당하게 테이블에 앉아라

성공한 여성은 미움을 받는다
​우리는 사다리가 아니라 정글짐을 오른다
멘토가 되어 주시겠어요? 
자신의 진실을 추구하고 말하라
일을 정말 그만두기 전에 미리 그만두지 마라
배우자를 진정한 동반자로 만들어라
슈퍼우먼의 신화
대화를 시작할 때다
평등을 향한 공동의 노력


페이스북 COO 셰릴 샌드버그의 책 <린인>의 목차다.
이 책은 블로그에서 알게되었는데, 읽고 싶어서 위시리스트에 올려만 놓고 대기상태였다. 그러던 어느날 이 TED동영상을 보고 말았지.


sheryl sandberg TED: Why we have too few women leaders

머리를 탁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을 정말 그만두기 전에 미리 그만두지 마라"
어떻게하면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난 조금씩 일을 미리 그만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일을 하려면 일이 너무나 재밌어야 하고 보상이 있어야 한다.. 왜 이 간단한 생각을 못했을까.
이 곳을 떠날 수 없다면 이 곳을 바꾸고 싶다, 우리 아이들이 살 세상은 딸들도 결혼과 육아를 거치더라도 경력 단절 없이 맘껏 사회생활을 하고, 집안일에 대해 아들들도 절반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한 너무나 작은 시작은 바로 그만두기 전에 미리 그만두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할지, 어떻게 앞으로의 삶을 그려야 할지 조금씩 명확해지고 기대가 된다.
막연하고 답답하기만 했던 상황이 생각의 프레임 변화 하나로 이렇게 달라지다니.

이 분의 다른 강연들, 유사한 주제의 TED 강연들도 들으니 영어공부까지 덤으로 된다!

HBS 졸업 축사
Barnard 졸업 축사
Reshma Saujani TED: Teaching girls bravery, not perfection

두고두고 듣고 읽으며 곱씹어야겠다.

+린인 커뮤니티@페이스북
www.facebook.com/leaninorg,
++Lean in community
www.leanin.org


Posted by 문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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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스토너의 일생. 
권선징악 없고 애잔하게 흘러가는 인생.
스토너의 일생이 멋지고 부러웠다. 
역자후기에 따르면 작가는 인터뷰에서 "나는 그가 진짜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스토너의 삶을 슬프고 불행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삶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어느정도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 일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요." 라고 말했다. 내가 느낀 스토너의 삶도 작가의 생각과 일치했다. 자기 일에서 꾸준히 애정을 느끼며 처음 영문학 수업에서 문득 깨닫게 된 섬세한 감각을 잃지 않는 모습, 자신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는 모습이 내게는 부럽게 느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서 이런 느낌을 얻고 애정을 느끼며 살지 못할테니까.
역자는 이 소설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세월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이같은 소설"
이 표현에 대해서도 어떤 느낌인지는 공감이 된다. 잔잔하다면 잔잔한 삶을 살아온 스토너에게 삶의 굴곡에 크게 저항하거나 맞서지 않고 굴곡을 순응하며 넘어온 '누이'의 이미지를 느꼈을 것이고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삶을 차분히 돌아보는 모습이 거울 앞에 선 모습 같다고 말한 것 아닐까. 이 표현에는 마치 굴곡에 순응하고 딱히 악인(?)들에게 저항하거나 통쾌하게 복수해주지 못한 스토너에 대한 역자의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소설 초반을 읽을 때는 나도 스토너라는 사람의 미성숙함에서 나오는 어리숙함과 약간은 떨어져보이는 사회성이 안쓰러움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스토너가 나이를 먹어 갈수록 자신의 일에 애정을 느끼고 딸에게서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느끼는 스토너가 부러워졌다. 스토너와 사랑에 빠지는 캐서린에 된 기분이랄까. 캐서린이 결국 그를 떠났음에도 그녀의 책에 스토너의 이름을 남기며 마음을 표현한 애정이 그들의 사랑이 서로를 얼마나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 같아서 마음 따뜻해지고 동시에 부러워졌다.
스토너를 읽고 나니 더욱 스톤 다이어리가 읽고싶어진다. 

Posted by 문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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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요즘 내 가장 큰 고민거리.

이 고민의 시작은 그저 작은 거였다. 왜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여유도 없이 살까?

 

내가 밤 10시 셔틀을 타고 집에 가도 한참 더 늦게야 집에 오는 신랑

주말에는 지쳐 뭘 보러 가고 어딜 놀러가기보단 그냥 푹 잠이나 잤으면 하는 생각에 아무것도 못하는 지금의 삶에서

과연 아이가 태어나면 더 얼마나 여유 없는 삶이 이어질까, 심지어 그때 난 일은 계속 할 수 있을까,

일을 하더라도 팀장님 말씀처럼 회사에서도 아이 생각에 발 동동 구르는 건 아닐까,

그러면서 내가 뭐하는 짓인가 고민하며 살게 되는건 아닐까,

그게 정말 행복일까,

아이 초등학생 될 때까지만 참으면 된다던데 그 8년의 시간은 안 소중한걸까,

왜 우리는 여유를 놓치며 살아야 하는걸까,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 우리도 순응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한국에선 어쩔수 없는 삶이니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그리고

정신 차리고 보니 저 3권의 책을 연달아 읽고난 후였다.

고민이 생기면 책 속으로 도망가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책을 골라 마구 읽고 밑줄치는 그 속에 내 마음이 있고 곱씹어 보면 답이 있을 거란 생각에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두었다.

 

어찌 보면 여기서는 행복할 수 없다,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책 내용들이 하나같이 그렇다.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이민간 이야기,

미국에서 북유럽으로 이민간 가족 이야기,

행복지수 1위 북유럽의 삶에 대한 이야기.

 

이 책들을 읽으며 책에서 말하는 이민자의 삶을 내게 대어보고 있었던 것 같았으니까.

이렇게 살면 행복할까, 그곳에 가면 어떤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 무슨 일을 하며 살면 행복할까.

 

닥쳐서 막 읽어댈때는 그래, 나가서 사는것 만이 답이구나. 싶었는데

역시 아무나 이민 가는건 아니었다. 생각보다 그건 엄청난 일이다. 우선 지금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을 처분하고 가야한다. 난 그럴 자신이 아직 없다.

책에 파고들던 열기가 식고 나서 다시 책을 읽었다.

전에 들어오던 글귀에 더해 이젠 다른 글들이 눈에 들어온다.

 

앞에서 나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에서의 탈출을 꿈꾸고 결단해야 한다고 썼다. 탈출은 어디인가로 도피하는 행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상 한국 사육장의 외부에는 외국 사육장이 있을 따름이다. 달아나도 가축으로밖에 생존할 수 없다. 언어와 문화가 상이할수록 그렇게 살 확률은 커진다. 그렇다면 진정한 탈출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육장 내에서 가축이라는 포박을 풀어내는 데 달려 있다. 사육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사육장의 주인을 쫓아내야 한다. 계나는 반문할 것이다.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그래서 뭐, 어떻게 해? 다른 동료 톰슨가젤들이랑 연대해서 사자랑 맞짱이라도 떠?" 나는 답변할 것이다. "톰슨가젤들이랑 사자랑 맞짱뜨자는 게 아니야. 톰슨가젤들이랑 사자랑 연대해서 우리를 부숴버리자는 거지." 이것이 사육장 너머를 지향하는 내가 최종적으로 도출한 방안이다.

- '사육장 너머로': 작품 해설, 허희

 

넘어가봐야 외국 사육장일 뿐일지라도 내 삶과 일의 균형을 맞출 수 있고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사육장이라면 행복할 것 같은 지금이지만

책을 많이 읽을수록, 한껏 들떴던 내 맘을 정리하면서 분명해지는 것은 한 가지 있다.

적어도 이 곳을 뜨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이 곳이 변화하도록 무언가 하고 싶다는 것.

도망가든지, 아니면 여기를 원하던 곳으로 바꾸든지.

 

사자에게 안잡아먹히면서 같이 연대해서 사육사랑 맞짱뜰 수 있는 배짱부터 키워야 겠지만.

Posted by 문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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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글 쓸때만 해도 책 링크를 바로 입력할 수 있었는데 어디로 숨은걸까.

 

 

남희 작가님의

"소심하고, 겁많고, 까탈스럽고"

홀로 걷는 길이 외로워 동행을 그리다가도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두려워 거리를 두고 싶어하고

그러면서도 커플의 모습에 눈꼴시려워하기도 하는

내 속을 들킨 것 같은 글이 좋아 남은 책장을 아껴가며 읽었었는데 

 

이번 책에선 작가님이 더이상 혼자가 아니다...

 

누군가는 리뷰에서 남희 작가님 글이 변했다며 중간에 덮었다고도 하던데

난 사모하던 가수님들을 (장가로) 떠나보내며 심지어 그들의 행복을 빌어줄 정도로 단단해진 팬심을 살려

달달한 장면이 날 힘들게 해도 꾹 참고 읽었다.

 

그리고 역시나 좋았다.

 

호주 여행을 준비하며 에버노트를 뒤적이다가, 옮겨적어놓은 밑줄들이 눈에 들어와 여기에 옮겨본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땀이 맺히도록 열심히 썬베드의 타월을 갈아주면서 밝게 웃어주던 칸쿤 리조트의 직원들을 보며

비록 신혼여행이지만 내가 여행을 '휴양'으로 와도 되는걸까, 고민하던게 떠오른다.

사실 칸쿤의 호텔존, 카리브해가 펼쳐진 해변은 그곳 원주민은 이제 쉽게 들어가서 몸담글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해변은 호텔을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나는 안락하게 카리브해의 바람과 별밤과 여유를 누리고 있지만 내가 누리는 이 호사는 리조트 직원들이 더욱 자본주의 체제에 물들어 갈수록 잘 유지될수 있다.

물론, 가장 자본주의화 된 곳을 직접 골라와서는 그런 의문을 갖고 있다는게 아이러니였지만.

 

호주 여행은 '휴양' 보다는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적당히 좋은 호텔과 함께 끝내주게 멋진 신혼여행지라는 해밀턴 아일랜드를 고르는 순간 휴양으로 기울었다.

이번 여행은 지친 일상에 여권 도장으로 잠시 휴식을 주는 걸로.

다음 여행은 지친 몸과 마음을 충전하는 휴양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그러려면 우선 일상이 지치지 않아야 하는게 아닐까 싶지만.

 

여행을 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에 균열을 만들어냄으로써 더 큰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인데, 여행자로서의 게리의 시선은 여전히 성 안에 머물러있는 게 아닐까. 가장 높은 산을 오르고, 가장 깊은 숲을 걷고, 가장 넓은 바다를 건넌다고 해서 한 사람의 영혼이 그만큼씩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청년이 중동을 여행한다고 친팔레스타인으로 쉽게 변하지도 않으며, 기독교 원리주의자가 여행을 통해 동성애자를 이해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질문도 없이 다니는 여행은 그저 여권에 도장 하나를 늘려가는 일일 뿐이다. 우리의 여행은 사유를 동반하는 여행이어야 한다. 내내 고민하고 질문하고 자신의 세계를 의심하는 여행이어야 한다. 그러니 어쩌면 좋은 여행의 걸음이란 열정이나 해방감, 자유, 이런 것들로 달려가는 발걸음이 아니라, 망설이고, 주저하고, 조심스럽게 내딛는 걸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또한 게리와 같은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내가 이해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해도 그렇게 살아갈수 밖에 없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였던가. 한국을 바라보는 게리의 시선은 내가 지금보다 젊고 혈기넘치던 시절에 가난한 나라를 바라보던 시선과 크게 어긋나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지나가는 여행자의 시선, 그것은 순간적이고 표피적인 것만 포착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본 것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여행을 통해 단련된 섬세한 시선과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조심스러운 태도와 그들의 처지를 먼저 헤아리는 배려가 나에게 충분히 있을까. 여행하는 내내 나는 얼마나 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 걸까. 
다른 여행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리의 뒷모습을 본다. 게리, 나도 젊을 때는 너처럼 생각했어. 나에게 부럽다고 말하며 떠나지 못하는 이들을 볼 때면 용기가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곤 했어. 하지만 한 자리를 지키는 것도 때로는 훌쩍 떠나는 것만큼의 영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 게리, 인간은 꿈을 꿀 수 있는 존재여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만, 꿈이 없이도 평생을 살아가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꿈이 없는 한 개인을 탓하기 전에 그가 어떤 사회적 배경에서 나고 자랐는지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 꿈과는 상관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애쓰고 있다는 것을, 꿈을 지닌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이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는 것도. 게리, 오늘 난 네 덕분에 여행자로서의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어, 고마워.  

 

 

 

Posted by 문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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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에 푹 빠졌다.

초등학교 미술시간 때 일이 기억 난다.
선생님께서 그리고 싶은 걸 그리라고 하셔서 난 노을을 그렸다.
파르스름한 빛과 층층이 붉어지는 빛의 경계면을 보고있으면 왠지 마음 아려지는 기분이 들어 노을을 좋아했었다.
그 느낌을 종이에 담아내고 싶어서 노을을 그렸다.
이상한거 그렸다고 선생님께 혼났다.

고등학교 땐 종이죽 인형 만들라고 하셔서 이티를 만들었다가 점수로 D를 받았다. 인형이니까 머리카락이랑 옷이 있어야 하는데 이티는 둘다 없어서 인형이 아니었다. 디테일을 꽤 잘 살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미적 감각은 학교랑 안맞는구나 했다.

하늘이 정말 예쁘게 그려진 웹툰을 보았다.
내가 본 웹툰 중에 가장 하늘이 예쁜 웹툰이다.
초등학교 때 이렇게 하늘을 표현했으면 선생님께 혼나지 않았으려나.
하늘을 좋아하는 분이 아닐까 한다.
나무와 하늘이 있는 풍경, 벽돌담 이끼와 잡초, 전신주와 하늘. 쓸데없는 사진 찍는다고 엄마한테 혼났던 내 어린시절 사진모음이 웹툰 안에 있다. 어린 시절 이후 한켠에 묻어둔 추억들이 나 여기있다고 소근 거리는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촉촉해진다.
주인공들의 말투는 툭툭, 간결, 담백한 느낌인데 그게 오히려 울림이 더 크다.
비지엠으로 걸어주는 음악들이 피아노곡이 많은 것도 좋다.
나래이션도 곰곰 읽으면 고소한게 좋다.


<진눈깨비 소년>을 보고 너무 좋아 <길에서 만나다>도 다 봤다.
금요일이 행복한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겼다.

<진눈깨비 소년> http://comic.naver.com/webtoon/list.nhn?titleId=622643

<길에서 만나다> http://comic.naver.com/webtoon/list.nhn?titleId=336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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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

저자
신영복 지음
출판사
돌베개 | 2015-04-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우리 시대의 스승 신영복 선생 강의의 모든 것『담론?신영복의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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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가며 한 장씩 한 글자씩 보듬듯 읽고 있다.

 

글을 읽고 있노라면 그분의 차분할 듯(?)한 목소리가 떠오르고 강의실 칠판에 나직히 써놓을 아담한 글씨들이 떠오른다. 문체에서 풍기는 차분함과 여유로움이 선생님이 겪으셨던 삶의 굴곡과 굴곡을 통해 평탄하고 깊어진 그릇을 느끼게 한다.

 

"나는 그동안 책을 여러 권 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책을 집필하지 않았다고 강변합니다. 옥중에서 편지를 썼을 뿐이고, 여행기를 신문에 연재했을 뿐이고, <강의>와 이 책처럼 강의를 녹취하여 책으로 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특별히 책을 집필하지 않은 이유를 소크라테스나 공자도 책을 내지 않았다는 것에 비유하는 것이 외람되지만, 강의록을 책으로 내면서 생각이 많습니다. '책'이 강의실을 떠나 저 혼자서 무슨 말을 하고 다닐지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책은 강의실보다 작고 강의실에는 늘 내가 서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하면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습니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 책을 내면서 중에서

 

"강의는 사람과 삶의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사람(人間)과 삶(世界)에 관한 인문학적 담론입니다. 당연히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고민한 문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실이 공감共感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의 강의가 마중물이 되어 여러분이 발 딛고 있는 땅속의 맑고 차가운 지하수를 길어 올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랜만에 남은 장수가 안타깝게 느껴지는 책을 만났다.

 

 

Posted by 문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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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2

저자
공지영 지음
출판사
분도출판사 | 2014-11-28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13년 만에 출간되는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그 두 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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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 동안 따스한 해변가 썬베드에 누워 읽은 책.

 

울컥 하는 감정에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르겠다. 다들 한가로이 노는데 정신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신혼여행에 책을 챙겨간 덕분에

 

책장엔 선물해준 대모님의 마음과 함께 바다내음이 함께 묻었다.

 

Posted by 문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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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미래보고서 2040

저자
박영숙, 제롬 글렌, 테드 고든, 엘리자베스 플로레스큐 지음
출판사
교보문고 | 2013-12-20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2040년, 우리의 미래를 소개합니다!『유엔미래보고서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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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교육을 해야한다고 전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을 익히는 곳이 대학이라고 언급하는 문단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읽은 글들의 신뢰가 사라졌다. 이런 시각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의 글은 얼마나 신뢰도 있을까. "과학적"인 시뮬레이션의 결과가 이 책이라 할지라도 초기값과 high order 로 보정되는 예측의 불확실성은 불가피하게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인류가 이미 지나온 기정사실의 역사도 서술하는 역사가의 관점에 의해 달라지는데 어찌될지 알 수 없는 확률의 세계인 미래는 어떻겠는가.... 꾸역꾸역 읽다. 그냥 덮을걸 그랬다.

Posted by 문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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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저자
한병철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2-03-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우울증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대한 우아하고도 날카로운 철학적 진...
가격비교

 


게으를 수 있는 권리

저자
폴 라파르그 지음
출판사
새물결 | 2013-05-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모든 일을 게을리 하세 사랑하고 한잔 하는 일만 빼고그리고 한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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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면접 때 면접관이 이렇게 질문했다고 하자.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부인/남편과 근사한 저녁을 먹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데 퇴근 시간 전에 급한 업무가 생겼다. 이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약속을 취소하고 야근을 해야만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입사하고자 면접장에 들어온 지원자라면 아마 당연히 야근을 하고 부인/남편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것이라 답했을 것이다. 아마 나 역시도 그렇게 답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친구에게 들은 것인데, 친구의 회사 동기가 입사면접때 실제 받은 질문이라고 한다. 이 질문에 대해 그 친구의 동기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우선 우리나라와 가장 시차가 벌어지는 나라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합니다. 야근을 해서 일을 마무리한뒤 부인과 함께 그 비행기를 타고 가서 아직 끝나지 않은 결혼기념일을 축하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이미 알다시피) 친구의 회사 동기가 되었다.
면접 준비할때, 난 입사만 된다면 회사에서 내 역량을 맘껏 발휘하겠다고, 열심히 일해서 일과 함께 나를 성장시키겠다고 다짐했다. 이전 직장에선 도무지 나를 성장시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이대로 도태될 것만 같아서 참을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입사한 회사에서 난 혼란을 느끼는 중이다. 신입으로서의 패기를 맘껏 야근과 특근으로 발휘하는 동기들. 그리고 일이 없으면 퇴근하는 팀선배들. 팀 선배들은 내게 말해준다. 회사보다 자신의 삶이 중요하다고. 너무 회사에 얽매여 있지말라고. 할거 없으면 퇴근하라고. 신입 교육때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2년만 죽은듯이 열심히 일하라고 말하던 임원들의 강의가 무색해졌다. 그 강의를 들으면서 난 날 뽑아준 회사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회사에 기꺼이 내시간을 바쳐야겠다고 다짐을 했더랬다. 근데 지금와서는 그 마음이 바보같은 것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다. 아니, 무엇이 맞는지 혼란스럽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내 삶을 일하는데만 쓰지 말아야 하는 그 어려운 중도의 길은 무엇인가.

면접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친구의 동기의 대답은 야근과 가족을 모두 선택한 현명한 답변이지만 어찌보면 참으로 씁쓸한 답변이기도 하다. 회사일때문에 퇴근하면 녹초가 되어 집에서 가족들과 몇마디 대화도 못나누고, 주말이면 주중에 일하느라 쌓인 피로때문에 늘어져 잠만 자게 되는 우리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기위한 밑천을 벌어들이려고 회사를 다니는데 그 회사때문에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아이러니. 회사가 우선이 되어야 하는지, 회사 외의 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뚜렷한 답이 있긴할까?

강신주 박사의 벙커1특강, "일"편을 들으며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것이 이러한 고민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강신주박사는 이러한 상황은 시스템의 문제라고, 노동자인 우리는 마땅히 향유하는 시간, 노는 시간을 극대화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자본가 입장에서야 당연히 회사를 위해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해줘야 이익이 나니까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왜 노동자들도 열심히 일하려고 하는거냐는 거다. 노동자들은 노동하는 시간은 최소화하고 노는 시간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야근하고 특근할 시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더 만나고 좋아하는 뮤지컬을 보러가라고 한다. 심지어 회사 는 쉬러가는 거라고, 퇴근해서 가족들이랑 놀려면 회사에서 에너지를 비축해야 한다고 말하니까 이사람의 입장은 아주 명확하다. 충전하러 회사간다. 회사 사장은 둘째치고 그사람 상사가 알게되면 참으로 펄쩍 뛸 이야기다. 하지만 무턱대고 그럴 수 없다고만 할 수도 없는, 참으로 유토피아적 입장이 아닐 수 없다.

강신주박사의 구어체적인 (듣기엔 무척이나 시원시원하지만 너무 간단하여 구멍이 많아보이는) 강의를 문어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어서 그가 (그리고 대모님이) 추천해준 폴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읽었다(다음에 독서로그로 작성할 예정). 칼마르크스의 사위이기도 한 폴라파르그는 자본주의적 시스템 속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착취가 마땅하고 당연시되었음을 강조하며 노동자들이 이에서 벗어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과잉노동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고 있으므로 노동자들은 이를 당연시여기고 최저근로시간을 요구하고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해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놀고 쉬고 게으르려고 해야 한다는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노동자들은 왜 열심히 일하려는 것일까? 왜 우리는 회사에서 기꺼이 우리의 삶을 소진하려 하는 것일까? 왜 워커홀릭이 되어야만 마땅히 승승장구한다고 여기는 것일까? 단순히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회사에서 짤리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삶을 택하려는 것인가? 일요일에도 회사에 있지 않으면 불안하고, 하루라도 공부하거나 일을 하지 않으면 삶을 낭비한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나를 포함해서…)들도 있다. 서점에는 성공하기 위해서 자기를 이렇게 계발하고 개발해야 한다고 외치는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있다. 이를 보면, 열심히 일하려는 삶, 게으르지 않은 삶을 기꺼이 택하려는 우리의 마음가짐은 누가 강요해서 오는 것이 아닌 듯 하다. 대체 왜 우리는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가며 아득바득 열심히 살려는 것일까?

이것에 대해 답하고자 했던 사람이 있다. 재독철학자, 한병철이다. 시집만한 두께의 책 <<피로사회>>에서 그는 결코 책의 무게만큼 가볍지만은 않은 무거운 문장들로 이에 답하고자 한다.

현대사회는 자기자신에게 도달점이 없는 무한한 지향점을 끝없이 강요하는 자기착취를 "자율적"으로 강요하며, 개인들은 자기착취를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하고 이로인해 스스로 고갈되어간다는 것이다. 그의 책은 독일어로 쓰여있어서 김태환 박사가 번역하였는데, 이 책 뒷부분에 역자가 실은 후기가 책의 내용을 잘 담고있는 듯 하여 옮겨본다.

(역자 김태환의 후기)
이 책의 핵심적인 테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사회를 부정해 온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타자에 대한 거부 등, 한병철은 이를 면역학적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이 적어도 20세기 말부터 긍정성의 패러다임(능력, 성과, 자기 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등)으로 전환되었거나 전환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회가 푸코적 의미의 규율사회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부정적 주체라고 한다면, 오늘날은 그 자리에 성과사회, 성과주체가 대신 들어선다. 이러한 테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근대 이후의 세계, 포스트 모던한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한병철이말하는 성과사회, 긍정성과잉의 사회는 흔히 얘기되는 후근대적사회, 즉 포스트모더니즘적 사회의 다른이름이다. 냉전의 종식, 다문화주의, 바이러스성 질병의 효과적 퇴치, 규제와 억압의 철폐와 개인적 욕망의 긍정 등 다양한 차원에서 관철되는 긍정성의 패러다임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병철은 바로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이 자아를 새로운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마치 늘어가는 자신의 지방질에 병들어가는 사람처럼,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마모시켜간다. 그 결과 스스로를 낙오자로 느끼는 우울증 환자가 넘쳐나고, 성과를 위해 약물을 복용하는 도핑주체도 증가하고 있다. 이는 금지, 강제, 억압의 철페, 타자에 대한 관용의 확대가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유토피아로 이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무한한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소진되고 있는 것이다.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다.


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는 '면역'이라는 개념에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면역은 쉽게 말하면 내몸을 지키기 위해 외부의 병균(항원)을 막아내려고 하는 저항체계인데, 예방주사는 매우 적은 양의 미역한 항원을 일부러 몸에 주입시켜서 이에 저항하여 몸을 지켜낼 수 있는 저항력(항체)을 미리 키워놓는 것이다. 이러한 "면역"적 관점에서는 '나'와 '외부'(혹은 '타인')이라는 경계가 존재한다. 나와 타인이 구분되는 경계가 있어야 나에게 침투하는 병균을 구분할 수 있는 거니까 말이다. 이렇게 '나' 자신과 나를 구속하고 강제하는 '사회'가 있는 소위 "면역학적 패러다임"이 존재하는 사회인 규율사회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에는 부정, 강제, 규율이 존재한다.
반면 현대사회인 '성과사회'에는 이러한 부정성이 없다. 나와 나를 규제하는 외부의 경계가 없어져서 나를 규제하는 주체가 나의 내면화된다. 내가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주체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안돼"라는 부정성이 아니라 "할수 있어"라는 긍정성이 넘쳐난다. 넘쳐남를 넘어 긍정성이 과잉된다. '나는 이러한 사람이 될 수 있어'라는 긍정성의 채찍은 목표에 끝이 없다. 사실상 나는 도달점 자체가 없이 열려있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뛰어간다. 스스로 끝없는 자기착취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끝없는 과정에서 자신은 점점 고갈되고, 도달할 수 없음에 신경적 스트레스를 받고 우울증에 걸린다. 이러한
성과사회에서 긍정성의 과잉에 의해 도달이 없는 자기 착취를 하고 있는 성과주체들.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성과사회는 '피로'를 향해 달려가는 '피로사회'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우리에게 벗어나야할 현실은 알려주지만 구체적인 실천론은 알려주지 않는 '자기계발서'들과 다를바 없지 않은가? 한병철 박사는 <<피로사회>>의 후미에서 불쌍한 성과주체들에게 희망을 주는 '새로운 피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본문)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그것은 한트케가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분열적인 피로"라고 부른바 있는 바로 그 피로다. "둘은 벌써 끝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오직 자아만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의,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피로는, 본래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아무 말 없이,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았다. 아마도 이러한 폭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직 타자를 일그러뜨리는 시선 속에서뿐이었을 것이다."
한트케는 이런 말 못하는, 보지 못하는, 분열시키는 피로에 대한 대립자로서 말 잘하는, 보는, 화해시키는 피로를 내세운다.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으로서의 피로는 자아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함으로써 틈새를 열어준다. 나는 그저 남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또한 남이고 "남이 동시에 나이기도 하다." 그 틈새는 "아무도 그 무엇도 지배하지 않고 지배적이지조차 않은" 친절한 공간, 무차별성의 공간이다. 자아가 줄어들면서 존재의 중력은 자아에서 세계로 옮겨간다. 자아 피로가 고독한 피로이고 세계가 없는, 세계를 없애버리는 피로라면, 한트케의 피로는 "세계를 신뢰하는 피로"이다. 그것은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가 그 속에 새어들어갈 수 있는 상태로 만든다. 그것은 고독한 피로속에서 완전히 파괴된 "이원성"을 복구한다.…
한트케는 노동하는, 움켜쥐는 손에 놀이하는 손을 맞세운다. 놀이하는 손은 움켜쥐지 않는다. "매일 저녁 여기 리나레스에서 나는 많은 꼬마녀석들이 노곤해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탐욕도 없고 손에 움켜쥔 것도 없고, 그저 놀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 깊은 피로는 정체성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풀어놓는다…사물들은 더 불분명해지고 더 개방적으로 되면서 확고한 성질을 다소 잃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무차별성으로 인해 우애의 분위기를 띠기 시작한다. 타자들과의 사이를 가르는 경직된 경계선은 거두어진다. "그런 근본적인 피로 속에서 사물은 결코 그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것들과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사물들이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도, 결국은 모두가 함께 어깨를 맞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피로는 깊은 우애를 낳고 소속이나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난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염려와 노동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할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시간과도 구별된다. 한트케는 이러한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묘사한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한트케는 내재적 성격을 지닌 피로의 종교를 구상한다. "근본적 피로"는 자아의 논리에 따른 개별적 고립화 경향을 해소하고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그 속에서 어떤 특별한 박자가 일어나 하나의 화음을, 친근함을, 어떤 가족적 유대나 기능적 결속과도 무관한 이웃관계를 빚어낸다. 무의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있다.



결국 우리에겐 유대가, 함께하는 무위의 시간이 필요함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유시민선생이 말하는 "연대"가 현대사회의 노동자에게 필요한 핵심열쇠인걸까. 아직은 난해한 그의 철학을 좀더 음미해봐야하겠다.

Posted by 문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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